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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반성의 기록, 징비록

세계기록유산으로 ~

조헌국기자 | 기사입력 2021/07/27 [13:52]

임진왜란 반성의 기록, 징비록

세계기록유산으로 ~

조헌국기자 | 입력 : 2021/07/27 [13:52]

 

 

  © 세이뉴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
, 임진왜란

 

1592413일 시작된 임진전쟁은 당시 조선·일본·명이 참전한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다. 조선에서는 1차 전쟁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며 2차 전쟁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이 전쟁을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

 

전쟁초기 일본은 총 266,700명을 편성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개전초기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하였다. 일본군은 전국시대 지속적인 전투로 단련된 강병이었으며, 그에 반해 조선은 비록 전쟁의 기미를 알고 1년 전부터 준비하였다고는 하였지만, 국방력이 전체적으로 쇠퇴하여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초기 관군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각 지방에서 의병이 등장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명군이 15927월 참전함으로써 전쟁의 국면은 전환되고, 조일 양국 간의 전쟁은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징비록, 회고의 기록

 

징비록은 바로 이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초기부터 종전까지 지휘하였던 류성룡이 남긴 회고록이다. 류성룡은 전쟁 초기 좌의정으로 재직하면서 전쟁이 격화되자, 영의정겸도체찰사로 전국을 지휘하였다. 전쟁 직전,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전쟁 중 군량의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속오군제도를 창설하였다. 특히 속오군 제도는 당시 국가재정 상황에서는 지방군까지 군량을 지급하기 힘들었으므로 군사와 농업을 겸하는 제도로 하여 천민들까지 군역에 포함시켰으므로 전쟁 당시 전국적인 방어망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던 제도였다.

전쟁이 끝난 뒤 류성룡은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전쟁의 원인과 과오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지난 날의 잘못을 경계하며, 뒤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는 의미의 시경구절을 따서 이름 붙인 것이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연구의 1차 사료로 당시 정치, 제도, 외교 등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서 징비록을 조명하는 학술대회 열려

 

728일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징비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전문가들의 견해를 모으는 [징비록의 기록유산적 가치] 전문가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징비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그리고 자료적 가치를 어떻게 제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심도 깊은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욱 교수(순천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징비록을 어떤 관점에서 부각하여야 할지,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진정성을 어떻게 확보하여야 할까에 대하여 발표한다. 이어 정해은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징비록의 자료적 가치를 탐색하고, 후대에 미친 영향력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우인수 교수(경북대)는 류성룡의 임진왜란 당시 정치사회적 위상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우인수 교수는 국정운영 책임자로서의 모습에 주목하여 징비록이 국정운영을 책임진 사람의 전쟁보고서이자 경륜에 기초한 경계의 기록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김영찬 박사(한국국학진흥원)은 일본에서의 징비록간행에 주목하여, 1678년부터 일본에서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1695년 일본에서 최초로 간행되었음을 설명하였다.

 

한국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자료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 중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징비록을 추가하기 위하여 그 가치를 선명히 밝히는 자리가 될 것이며, 임진왜란이라는 430년 전의 역사가 다시 재조명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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